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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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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17:47:36

 

감정으로 기억한다
 

로즈마리

 

  볕이 좋아 걸었다. 길가에 참외를 파는 트럭이 보여 만원어치 샀다. 내가 어린 시절 참외는 수박처럼 한여름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지만 이제는 벚꽃이 피는 봄에도 참외를 먹을 수 있으니 제철 과일의 경계는 사라진 것만 같다. 트럭에서 사온 참외를 깎아 딸 둘에게 내미니 큰애는 사과를 달라고 한다. 반면 네 살배기 둘째딸은 어눌한 발음으로‘차메 맛잉따’라며 앵두 같은 입술로 한입 뵈어 문다. 우적우적 참외의 단물이 새어나오는 입술 사이로 아빠의 입술이 겹친다.
  나의 가족은 모두 참외를 좋아했다. 그것이 유일한 나의 가족의 공통분모이다. 늘 한 집에 자취생들처럼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고 밥도 알아서 먹곤 했던 가족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참외를 깎는 날에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특히 아빠가 노란 참외를 좋아했다. 평소에 같이 뭘 먹자고 해도 마다하셨던 아빠였지만 참외만큼은 가족들 중에 먼저 입에 가득 넣어 드셨던 분이다.
  나의 가족은 언제부턴가 다함께 모이지 않았다. 아빠가 방에서 나오지 않아서이다. 평소에는 각자의 생활패턴대로 살더라도 생일이나 명절에 다함께 밥을 먹자고 해도 아빠는“됐다. 내가 언제부터 같이 먹었다고!”라는 말로 신경질을 부렸다. 
  여름에 가까운 계곡을 가자고 하더라도 늘 아빠는 안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더니 남은 가족끼리 갔다 오면 자기만 빼고 갔다 왔다며, 난 늘 혼자다, 라는 말로 가족들의 마음을 죄책감 들게 했다. 우리들이 밥을 먹고 나오면 그 다음에 밥을 먹고, 다과를 먹자고 해도 안 먹었다가 나중에 혼자 드셨다. 아빠는 이처럼 늘 가족들 주변을 맴돌며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같이 하자고 말하면 신경질을 부리며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더니 아빠만의‘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 방은 어느 누구도 문 열고 들어 갈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점차 우리는 아빠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아빠의 상처가 약간 긁힌 것인지, 아니면 깊숙이 곪은 것인지 누구도 상처에 관심 갖지 않았다. 모두 외면했다. 아빠와의 관계는 처음엔 불편하다가 익숙해지면서 괜찮아졌다.

 

   내가 대학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갔을 때는 엄마하고만 통화하고 이야기 나누는 게 당연해졌다. 그러다보니 나는 아빠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 나에게 아빠가 있었나,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있었나. 입술을 오므리고 “아”, 입술을 벌리고 “빠”를 발음해본다. 낯설었다. 나는 아빠 없이 자랐다는 것이 정확할지 모른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결혼과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골에서 고생해서 자식들 대학까지 보내느라 고생한 엄마만 보였다. 늘 부르튼 입술과 검게 탄 얼굴, 주름진 엄마! 반면 아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점차 나는 엄마편만 들고 아빠 곁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 나도 안다. 아빠가 몹시 외로워 하루하루 살아지는 게 지독했다는 것을. 나에게 아빠는 마주보면 밉고 안보면 안쓰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아빠와의 관계는 수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여름이 일찍 찾아왔던 5월의 어느 날, 경기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내려가는 길이니, 나도 곧 병원에 도착할거라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빠 병원에 있는거 아니냐고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보니 새벽에 아빠가 갑자기 쓰려져 119에 신고하여 남원의료원을 거쳐 현재 전북대 응급실에서 막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것이다. 딸이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엄마는 임신한 딸이 걱정되어 멀리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아빠는 누가 농사꾼 아니랄까봐 논에 모를 다 심은 그 날 밤에 갑자기 의식을 잃으신 거였다.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5일 만에 눈을 감았다. 늘 침묵하였던 아빠는 마지막 순간에도 조용히 생과 작별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내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생명을 잉태한 채로 생명이 꺼져가는 아빠를 바라보는 건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또 무어라 말 할 수 없이 복잡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울어도 되는 존재였나. 내가 마냥 슬퍼할 수 있을 만큼 아빠와 각별한 사이였던가. 장례식 내내 나는 양가감정으로 혼란스러웠었다. 아빠는 가족들과 단절된 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방을 한 번도 노크하지 않았던 가족들은 그걸 은폐하기 위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정당한 분노를 아빠에게 갖다 붙였다.
  비로소 나는 아빠가 눈을 감아서야 얼굴을 마주보고 말을 걸고 차가운 손을 잡아보았다.
  나는 아빠가 떠난 지 4개월 후 딸을 순산했다. 그 딸은 아빠처럼 참외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는다. 딸아이는 나를 많이 닮았다. 엄마는 어릴 적 나랑 똑같이 생겼다며 딸아이를 나를 부르듯 ‘장미야’ 하고 부른다. 내가 딸아이만 했을 때 아빠, 하고 크게 부르며 안긴 적이 있었을까. 딸아이를 안아본다. 딸아이를 안는 것인지 어릴 적 나와 포옹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딸에게 말한다. ‘화원아, 아니 장미야, 아빠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만 미안해하렴.’
  아빠와는 경험했던 공유의 사건 보다 주로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감정으로 기억한다. 아빠가 곁에 있을 때 오히려 나에게 아빠가 없었다. 나는 아빠가 세상을 떠나자 문득문득 아빠에게 말을 건다. 아빠, 오늘 볕이 좋아, 라고.

※ 로즈마리는 5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고 임신 및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6년간 전업주부로 육아에만 전념하는 수행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올해 두 딸들이 모두 유치원에 다니면서 비로소 해방의 시간을 갖게 되어 가슴 뛰는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전주시직장맘블로그기자단에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기자단 활동을 통해 경험, 일상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개인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실천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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